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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국코다이협회 소식지 (2022년 3분기)
Korean Kodály Society News Letter

행복한 가을에
인사를 드립니다.
무더위와 비바람이 지나고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높은 하늘과 기분 좋은 햇살을 누리며
음악과 함께 풍성한 가을이 되시기 바랍니다.
'가을은 모든 이의 것입니다'
- 사단법인 한국코다이협회 -
이영조 이사장 인사말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힘들게 흘렸던 땀방울이 이제는 결실을 맺을 때입니다.
특히 이번 가을에는 우리 협회 산하 예술단체인 서울코다이합창단이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한글 가곡제'로 한글날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찾아주셔서 함께 우리의 얼인 한글로 음악을 즐기며 뜻깊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것을 잊지 않고 우리 만의 개성을 되찾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 생각합니다. 한국적, 현대적, 창조적 예술에 모든 것을 일조하는 한국코다이협회의 활동을 앞으로도 지켜봐주시고 관심가져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조홍기 회장 인사말
공교육 과정에 포함된 예술계열 5개 분야(연극, 영화, 무용, 사진, 문예창작)의 교육과정 시안 아야기가 시작된 것이 7년전이었습니다. 현재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 음악, 미술과 함께 연극이 새로이 포함 되어있고 무용도 곧 들어올 가능성이 많아졌습니다.
만약 고교에서 예술 과목을 선택하라고 하면 가르치는 입장에서 보면 문학적 연계성과 학생들의 활동, 참여, 효과성을 보면 당연히 연극을 더 선택할 것이고 특히 요즘처럼 학교 폭력등 학생 문제가 많을수록 연극이 효과적인 치유방법으로 각광을 받을 것입니다. 여학교라면 무용과 미술을 더 선택할 것입니다.
최근 국어 학자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나라가 문맹율에 비해 문해력이 너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글 하나씩 읽기는 하는데 단어나 문장에서 무슨 뜻인지 소통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요즘 신세대 용어나 영어식 신조어를 모르니 생기는 문제일 것입니다. 음악도 도레마파를 말할 수는 있어도 높낮이를 모르고 음의 길이를 알기는 해도 그것을 표현하고 들을 줄을 모르는 기초적 문해력이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공교육 입안자들의 생각은 음악을 위한 음악이 아니라 교육학을 위한 음악을 하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음악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기 위해서는 공교육에서 제대로 가르쳐야하고 문해력이 음악교육의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이귀향
한국코다이협회
부회장 소개
간략한 본인 소개
저는 성신여자대학교 교육학 박사를 수료하였으며 서일대학 유아교육과 학과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코다이 교육을 알게 된 동기
대학원에서 음악교수법을 배우면서 졸탄 코다이 음악교수법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제 스스로 코다이 학회 세미나에 참석하며 한국코다이협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코다이협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분 중 한 분인 조홍기 회장님을 이 전부터 알고 같이 활동하며 지켜봤습니다. 순수하게 코다이 음악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해마다 코다이 합창발표회, 코다이세미나, 직무 연수, 코다이 교사 양성 등을 통하여 꾸준히 계획을 실행하시는 추진력은 존경스럽기도 합니다. 근래에 들어서 코다이 음악이 꽃을 피우고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을 보면서 저는 가슴이 벅차며 감동을 받고 있어요. 계속 지금껏 고생과 수고하시며 묵묵히 해오신 것처럼 하시면 한국의 음악교육의 선구자가 혹은 세계적인 한국의 코다이 협회가 되어계실 것입니다. 지금 현재도 대단하게 가까이 근접해 있다고 생각해요. 여러 선배님, 후배님들 힘내시기 바랍니다!
하고싶은 말 또는 앞으로의 희망
코다이 협회가 지금껏 별일 없이 잘 운영되었습니다. 이영조 이사장님, 회장님, 임원진 분들과 회원님들이 더욱더 협력하시어 긍정적인 사고를 모든 것을 해결하시고 실행해 나가시면 잘 되실것이라고 생각 되어 집니다. 우선은 한국에서 가장 우수한 코다이 음악협회가 되실 것을 믿습니다.

협회회원소개
이원재
간략한 본인 소개
안양대 음악과, 독일 카셀음대를 졸업하여 한국 오라토리오 합창단 부지휘자, 서울 그랜드 오페라단 활동을 역임하였습니다. 현재는 대구에서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코다이 교육을 알게 된 동기
2002년에 코다이싱어즈 반주를 하며 코다이교육은 알고 있었지만 일정이 맞지않아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다가 이번 예술꽃 씨앗학교의 강사로 참여하면서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번 '예술꽃씨앗학교' 교육에 동참하며 느끼는 점
코다이 교육이 어느 세대에게나 음악에 도움이 되는 음악교육임을 느끼고 있고 여러 상황에서 코다이 교육을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하고싶은 말 또는 앞으로의 희망
짧은시간의 교육으로 수업에서 부족함을 많이 느낍니다. 좀 더 열심히 해서 당당한 교육자가 되고싶습니다.
<노래부르기와 민요의 역할>

어린이의 음악적 모국어, 민요
코다이는 민요가 어린이의 음악적 모국어이며, 따라서 어린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말을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국의 민요를 아주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어야 한다고 늘 주장했습니다. 헝가리 어린이들에게는 헝가리 민요를 가르쳐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따라 헝가리의 음악교육도 이것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헝가리 어린이들 대부분은 유치원을 다니면서 ‘노래부르기’와 같은 놀이학습을 통해 민요에 의한 동요를 배우게 됩니다. 아이들은 어렸을 때 자연스럽게 배운 리듬과 가락들을 자신의 기억 속에 간직하며 자라납니다. 그로 인해 어린이는 음악을 공부를 하거나 음악을 접하게 될 때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민요를 통한 음악 지식’과 자연스럽게 연관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코다이교육의 핵심 '노래부르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코다이 교수법은 모든 음악적 표현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노래 부르기’에 두고 있습니다. 유치원부터 시작한 모든 음악적 표현 방법으로 ‘노래 부르기’를 할 수 있도록 교육된 어린이들은 일반 학교와 특수 음악학교에서도 계속 노래 부르기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나가고 나면 비록 어떤 악기를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항상 음악을 감상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사람으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노래부르기' 훈련의 중요성
코다이는 인간의 목소리가 사람에게 가장 유용한 악기이며, 음악에 접근하고 감상하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음악은 노래부르기와 관련되어 있으며, 최상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음악은 바로 현악기와 관악기가 노래하는 것 즉 칸타빌레(Cantabile:노래하듯이)로 연주하는 것입니다. 만약 악기 연주자들도 자신들이 먼저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작품에 대한 최고의 해석자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연주를 위해 노래로부터 접근하는 것은 단지 가락적 요소 때문 만은 아닙니다. 훌륭한 음악가라면 자신의 악기로 연주하기 전 먼저 마음속으로 음악을 노래해 볼 것입니다. 이런 능력을 훈련시키고 연습시키는 것이 코다이가 강조하는 ‘노래 부르기’ 훈련의 기능인 것입니다.
코다이 교육의 효과적 방법
코다이 교육법에서 노래 부르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다면 과연 어떠한 방법이 가장 효과적일까요? 앞서 말했듯 코다이는 어린이들이 모국어를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민족 고유의 민요를 먼저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오직 이것을 완전히 소화하고 난 후, 즉 자기 모국어 음악을 읽고 쓸 수 있게 된 후에야 다른 나라의 음악을 공부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민요를 부른 다는 것은 음악교육의 바탕을 이룰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도 고유한 음악적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고유의 민요와 다른 민족의 민요가 간직한 소중한 가치는 각 나라의 어린이들에게 음악의 가락과 리듬을 가르치는 가장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코다이 민족음악 사랑의 시작
'걸란터 (Galánta)'
걸란터(Galánta)는 오스트리아 ‘빈’과 헝가리 ‘부다페스트’ 사이에 위치한 현재는 슬로바키아 남서부에 속 한 도시입니다. 철도원이였던 아버지를 따라 코다이는 어린시절 여러 도시를 옮겨다니며 거주하였습니다. 당시 갈란타는 서부 헝가리의 시골 마을이였으며 코다이는 유년기인 1884년부터 1891년까지 7년 정도를 이곳 갈란타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걸란터의 지리적 역사로는 10세기 후반부터 1918년까지 헝가리 왕국의 일부였던 것을 시작으로 1421년부터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지배를 받았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된 1918년 이후로는 체코 슬로바키아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2차 세계대전과 여러 정치적 이해관계로 헝가리로 반환되었으나 결국은 현재 슬로바키아의 영토가 되어 빈과 부다페스트를 연결하는 거점 도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걸란터의 구시가지
